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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영천 가볼만한곳/충절의 표상 정몽주를 기리는 임고서원/ 2018.8.22.

by 토토의 일기 2018.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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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가 영천 태생이라는 것을 알고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서울인 개경까지 어떻게 갔을까.걸어서 갔을까. 말을 타고 갔을까. 그런 유치한 생각.

그만큼 먼 과거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분이다. 그분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임고서원 가까이에 그분의 출생지도 있다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근래에 임고서원을 정비하여 으리번쩍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분이 이것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과연 ....


임고서원(臨皐書院)



◼ 시 대 : 조선 명종 8년(1553)

◼ 소재지 : 경상북도영천시임고면양항리 494-1

◼ 지정별 :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Kyongsangbuk-doMonumentNo.62)

◼ 지정일 : 1985.10. 15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53)에 진사 노수(盧遂). 생원 김응생(金應生). 향노(鄕老) 정윤량(鄭允良). 생원 정거 등이 사람들과 창건을 의논하여 부래산(浮來山)[고천리앞산]아래 창건을 시작,
 2년 뒤인 1555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우리 나라에서 2번째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6년(1603년)에 중건, 고종(高宗) 8년(1871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선생을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부터 현재까지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복위6년(1337)에 현 임고면 우항리(愚巷里)에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전법판도판서(成均大司成典法版圖判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명나라의 국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흉년에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저장하여 두던 창고]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되었으며 또한 시문과 서화도 뛰어났었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사람으로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였으나 공양왕(恭讓王) 4년 (1392) 에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원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元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묘에 배향됨. 이 곳에는 포은 정몽주선생의 영정외에 500년수령의 은행나무, 10종25책의 보물로 지정된 전적(典籍)이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동방이학지조'란 돌비석이 임고서원 입구에 떠억 버티고 서 있다.)

유물관은 월요일이라 문이 잠겨 있었다.

잠겨진 유물관 문에 이런 광고지가 붙어있었다.

창작 오페라 포은 정몽주
8월 31일 저녁 7시
임고서원 은행나무

두어해 전에 유물관 앞뜰에서 영천지역 연극인들이 연극 공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제 지방에서도 이런 문화예술공연이 자주 있다. 지역민으로서 환영한다.

유물관 앞마당에서 조옹대 올라가는 계단을 볼 수 있다. 잠깐이면 올라갈 수 있는 높이. 포은 선생이 낚시를 즐겨해서 정자 이름을 '조옹대'라 하였다 한다.

올라가보니 정자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앞쪽에는 조옹대, 뒤쪽에는 무괴정. 한점 부끄럼없기를 바랐던 포은 선생의 마음을 헤아린 작명인가.

조옹대에서 내려다본 임고서원 모습이다. 너무 새것이라 드라마세트장을 보는 듯한 느낌. 세월의 때를 입지 않은 새것 그대로인 것에 대한 생경스러움.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 친근한 옛것이 되리라.
 

임고서원에는 새로 지은 신서원과 구서원이 따로 있다. 신서원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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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은 경앙문, 위의 문루는 영광루이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임고서원 강학공간(흥문당)이 보이고 좌우로 기숙공간(수성재)과 교수진이 묵을 집(함육재)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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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으로 치면 교실, 강학공간인 흥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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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으로 말하면 학생기숙사인 수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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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으로 치면 교무실 겸 교직원 숙소 함육재

흥문당 측면에 있던 심진각. 무슨 용도로 쓰이던 건물일까?

서원 마당에서 건너편 산위에 있는 조옹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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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원 옆에 있는 구서원 입구인데 문이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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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안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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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서 마당으로 나오니 정몽주의 시비와 안내판이 서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이방원(후일 조선 태종)의 하여가에 대하여,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의 단심가로 답한 정몽주. 이 단심가는 새로 개국할 조선에 협조할 뜻이 없음을 내비치고 있다.

이를 간파한 이방원이 휘하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打殺타살한 것이다. 학창시절에 이 시조의 배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몽주를 기억하게 된 것 같다.

수령 500년된 유서깊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임고서원이 원래는 부래산 밑에 있었다는데 그 때 그곳에 있던 나무를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 하니, 세월의 변화를 이 나무는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나무가 너무 커서 바로 가까이에서는 다 담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경외감을 가지고 가까이에서 한 컷.

북한 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선죽교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대한민국에 없을 것이다. 개성 선죽교도 포은 선생의 후손이 원래 다리는 통행을 못하게 난간을 둘러막고 그 옆에 보조다리를 하나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임고서원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선죽교 옆에 배롱나무꽃이 환히 피어 있었다. 그  꽃가지 사이로 임고서원을 다시 한번 돌아다보고 서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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