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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모명재(慕明齋)/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재실이 대구에 있다/가벼운 겨울나들이 코스로 좋은 곳

by 토토의 일기 2018.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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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만촌동 715-1)

대구 (구)남부정류장 뒤로 지나다닐 때마다 '모명재'라는 표지판을 보았었다. 볼 때마다 '명나라를 사모하는 집'이 도대체 왜 이곳에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근래 계산성당 옆 뽕나무골목의 주인공 두사충을 모신 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번 가 봐야지 하면서도 이제껏 미루다가 그저께 다른 약속으로 남부정류장쪽 가는 길이 있어 잠시 들러보았다.

남부정류장 뒤편 길에는 모명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여러 개 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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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입간판도 찍어서 보관한다. 낯선 길일 때는 유용한 길잡이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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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길 옆으로 이런 좁은 인도가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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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모명재 방향으로 접어든다. 여기쯤 오면 저쯤에 모명재 한옥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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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초입에 작은 공원도 꾸며놓았다. 배롱나무가 많아서 여름에 다시 와야겠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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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바로 못 미쳐 명정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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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내린 정려이다.
 
추운 어느 겨울,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몸져누운 어머니가
송이버섯을 먹고싶다고 하자, 마을 뒷산에서 버섯을 찾기시작하자,
아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하늘이 선물을 내렸는데,
눈덮인 큰 소나무밑에 송이버섯을 발견하여 버섯죽을 끓여 드리니
어머니가 원기회복하셨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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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두 차례 조선에 와서 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기리기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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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의 대문에는 '만동문'이라 새겨져 있다.

만동문 (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 온 것으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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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이순신 장군이 지어 보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는 대청 기둥, 충무공의 7대손인 삼남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와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듬은 2점의 문인상이 있다.

뒷산 형제봉 기슭으로 두사충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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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유재란 두 난리에 원정군으로 참전한 두사충은 충무공 이순신과도 교분을 쌓았는데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두복야에게 바친다는 뜻. 복야는 두사충의 직책》라는 시를 지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 시가 모명재 대청 기둥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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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주차장 한 켠에 두사충과 이순신 장군이 술을 나누는  조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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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보낸 시 중 마지막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今日一盃情
"오늘은 한잔 술로 정을 나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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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구청홈페이지 모명재 관련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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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mj.suseong.kr/story/01.htm

아래 내용 출처 : 수성구청
(안내판은 12.5.촬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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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사충 그는 누구인가?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 두사충(杜師忠).

두사충은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원군 온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습니다. 지세를 살펴 진지를 삼을 만한 좋은 터를 잡는 일이 그의 임무로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어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왜 한국의 역사가 되어 한국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역사 속 두사충과 조우하며 모명재길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볼까요!


📚명풍수(名風水), 조선에 오다

때는 1592년 임진년, 한양 봉수대에 연기가 활활 피어올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임진왜란 발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그의 일급 참모이자 풍수전략가인 두사충과 함께 조선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593년, 조선의 관군과 의병, 이여송과 두사충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군은 왜군을 격파하며 평양성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전투에서 왜군에 대파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패전의 모든 책임이 진지의 위치를 잡는 임무를 맡은 두사충에게 돌아갔습니다.
“두사충을 참수하라!”
그러나 참패의 원인이 진지의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다는 우의정 정탁(鄭琢, 1526~1605) 등 조선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간신히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두사충.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는 길, 알 수 없는 기분이 두사충을 감싸 안았고 그는 조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두사충, 대구에 뿌리를 내리다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7년간의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면서 두사충은 직감할 수 있었어요. 바람 앞의 등불은 ‘조선’이 아닌 바로 ‘명나라’라는 것을. 명(明)이 기울고 청(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두사충은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합니다. 그리고 대구 땅에 터를 잡게 되지요. 그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두고 왜 대구에 정착을 했을까요?
조선 조정에서는 귀화한 두사충을 극진히 대우하며 그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의 전쟁에 모두 출전하여 공을 세운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조선에서 살겠다하니 그럴 만도 했지요. 조선의 산세와 지세를 훤히 꿰뚫고 있던 두사충은 오래 전부터 대구를 마음에 둔 터였어요. 그가 대구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자리입니다. 그자리는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오늘날 대구의 상업중심지가 되었으니 그의 풍수가 신통방통하게 들어맞은 셈이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경상감영(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 부지로 결정되자 두사충은 나라를 위해 그 땅을 흔쾌히 내어 놓습니다.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조정은 지금의 계산동 땅을 하사하였으나 이 땅마저도 추위에 떠는 백성들의 의복을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습니다. 계산동 일대를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경상감영공원, 계산동 뽕나무 골목 이외에도 두사충은 대구 곳곳의 역사와 이야기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두사충이 대구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두사충 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대덕산(앞산)을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움이 한없이 메아리치자 두사충은 아예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와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제단을 쌓아 매달 초하루 관복을 입고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습니다. 또한 호를 ‘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모명(慕明)’으로 바꾸었어요. 두사충이 배례를 올렸던 대덕산 일대는 현재까지 ‘대명동(大明洞)’이라 불리며, 대명동은 11동까지 있는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 되었습니다.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의 안목이 느껴지는 부분이지요.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답게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은 ‘모명유결(慕明遺訣)’이란 풍수서를 펴냈습니다. 지금도 이 책은 풍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흙이 되어

어느덧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묘터를 스스로 점지해둔 터였습니다.
그가 미리 보아둔 대구 최고의 명당은 어디일까요?
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지요.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인 두릉두씨(杜陵杜氏)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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